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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인문학"이라는 용어 사용의 문제

인문학 쓸모 논쟁과 관련된 한 블로그 글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일견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이 논쟁을 그래도 좀 더 생산적으로 만들려면, 우선 "인문학" 분야 종사자들부터 "인문학"이라는 용어 사용을 지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보통 "자연과학" 혹은 "사회과학"과 비교/대비되는 맥락에서 주로 사용된다. 이 때 불가피하게 부각되는 것은 양자의 방법론적 차이다. 전자의 탐구 방법론은 어떤 방식으로든 후자의 '과학적 방법론'과 비교/대조 대상이 되고, 이 맥락에서 종종 전자의 '비과학성'이 비판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인문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지만, 체계적인 실험을 설계하고 그 결과에 대한 정량적 분석을 핵심으로 하는 '과학적 방법론'은 역사학, 철학, 문학에 (부분적 차용은 가능할 수 있겠으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위에 링크한 글이 지적하고 있듯, 현대의 역사학, 철학, 문학은 19세기 이후로 진행되어 온 학문 전문화 과정의 산물이며, 그 과정에서 각 분야의 연구 방법론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하지만, 그 방법론들은 '과학적 방법론'처럼 하나의 통일된 '인문학 방법론'으로 묶일 수 없다. 예컨대, 역사가의 방법론과 철학자의 방법론 사이에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이 '자연과학'으로 묶이는 것은 이들이 공유하는 '과학적 방법론'으로 정당화가 가능하지만, 역사학, 문학, 철학 등이 '인문학'으로 묶이는 것은, '과학'에 속하지 못하는 나머지 떨거지 분야 모음이라는 인상만을 남기기 십상이다. 그러니, 방법론의 관점에서 볼 때, 학문을 자연과학과 인문학으로 분류하는 것보다는, 자연과학, 역사학, 철학, 문학으로 분류하는 게 더 합리적이다.

 

"인문학"이라는 용어 사용을 지양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용어의 사용이 역사학, 철학, 문학의 문턱을 낮춰, 사이비/비전문가들의 자유로운 출입을 유도한다는 데 있다. 해당 분야에 박사학위가 있지 않은 이가 자신을 물리학자, 화학자, 생물학자, 혹은 자연과학자로 지칭하는 것은 학계는 물론 대중들 사이에서도 용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학, 철학, 문학 중 그 어느 분야에서도 학위가 없는 이들이 스스로를 '인문학자' 혹은 '인문학 전문가'라고 지칭하며, 각 분야를 넘나드는 책을 쓰고 대중에게 강연을 하는 것은 너그럽게 용인된다. 아마 대중에게 가장 권위있는 '인문학 전문가'는 유시민 같이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없는 "만물박사"일 것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역사학자', '철학자' 혹은 '문학자'라고 지칭하는 데는 부담을 느끼겠지만, '인문학자'라고 지칭하는 데는 스스럼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게 인문학은 역사적, 철학적, 문학적 지식을 제멋대로 버무린 "교양"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역사, 철학, 문학 전문가들은 웬만해서는 자신이 연구 주제로 삼은 작은 영역을 넘어서지 않는다. 예컨대, 20세기 미국 정치사 전문가가 18세기 프랑스 문화사나 19세기 물리학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이와 달리, 자칭 '인문학 전문가'들에게는 역사, 철학, 문학 사이의 경계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의 경계 넘기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라는 모호한 용어다. 이 용어는 그들이 각 분야를 넘나들 때 내미는 '통행증'으로 주로 사용될 뿐, 그 외 별다른 유의미한 사회적 기능을 하지 않는다.

 

"인문학"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논의를 역사학, 철학, 문학으로 구분 한다면, '쓸모 논쟁'이 좀 더 구체적이고 생산적이 될 수 있다. 역사학을 예로 들어보자. 역사란 집단의 기억이다. 그리고 이 집단의 기억은 집단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절대적인 원천이다. 개인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워진다. 개인의 정체성은 그가 가진 기억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이는 기억 상실증에 걸린 이라면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로 쉽게 확인 가능하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는 '나'가 존재할 수 없듯, 집단 기억이 없는 '집단'은 결국 해체될 수밖에 없다. 또한, 과거 사건과 과거 경험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가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결정한다. 집단 기억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한국인들에게 일제 강점기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없었다면, 많은 한국인들의 정서에 박혀 있는 '반일 감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집단 기억은 자연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역사가들은 집단(국가든, 단체든, 분야든)의 기억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 각자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에 관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제공한다. 이러한 공동의 토대는 곧 집단의 정체성 형성으로 이어지며, 나아가 집단의 현재와 미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역사학에 사회적 효용을 부여하는 유일한 기능은 아니지만, '쓸모 논쟁'의 출발점은 될 수 있다. 철학과 문학 '쓸모 논쟁'의 출발점은 당연히 각기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