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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학위를 가진 책팔이들에 대한 단상 (feat. 샘 해리스, 유발 하라리)

도킨스가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gene's eye view'를 소개한 이후, 유전자의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진화심리학이라는 괴상한 유사과학이 생겨났고, 이제 이 유사과학은 "지성인"을 위한 대중출판시장을 오염시키고 있다. 여기에 앞장 선 이들이 학문적 훈련을 받지 않은 아마추어들이 아니라, 샘 해리스나 유발 하라리처럼 과학이나 역사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학자'들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일까. 이들은 본인들이 잘 모르는 분야를 거침 없이 넘나들고, 검증되지 않은 혹은 검증할 수 없는 명제들을 하나 둘 쌓아서 대중들을 유혹할 만한 매력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재능이라면 재능이지만, 인류에게 유익한 재능은 아니다. 이들은 주장을 위해 사실을 희생시키고, 없는 위기를 만들어 내며, 엉뚱한 해답을 제시한다. 문제는 그게 또 대중에게 잘 먹힌다는 것.

누군가는 분과를 넘나드는 위대한 책들을 써 냈는데 사소한 오류들 좀 섞여있는 게 뭔 대수냐고 반문할테지만, 저 책팔이들의 문제는 사소한 오류 몇 가지를 검증 없이 책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이들의 문제는 논증 방식이 잘못-거꾸로-됐다는 데 있다. 아카데미에서 잘 훈련받은 학자들은 팩트-체킹에 민감하다. 앞에 놓인 수많은 명제들 중 사실인 것과 사실이 아닌 것을 엄밀히 검증하고, 검증된 사실들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하나의 주장에 도달한다. 이들에게는 사실 검증이 최우선이며, 주장은 그 사실들이 지시하는 범주를 넘어서지 않는다. 아무리 매력적인 주장이라도 그것이 오류에 근거한 것이라면 유효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장을 위해 없는 사실을 삽입하거나, 있는 사실을 빼거나, 그것을 살짝이라도 뒤트는 행위는 지양된다. 반면, 책팔이들에게는 사실보다는 주장이 우선이다. 사람들의 관심을 단번에 끌만한 주장을 먼저 수립한 뒤, 사실들을 거기에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잘 맞는 사실들만을 선별하고, 빈 곳이 있으면 없는 사실을 슬쩍 만들어내며, 잘 들어맞지 않는 사실은 적당히 변형시킨다. 그래서 이들은 학자가 아니라 스토리텔러에 가깝다. 이들이 만들어 내는 작품은 논픽션보다는 매력적인 허구에 가깝지만, 대중은 이들이 이 세상과 인류에 대한 '사실'과 '진실'을 얘기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독이든 사과를 유기농 사과로 착각하는 셈이다. 안타까운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학자들이 좀 더 이런 책팔이들에 대한 비판을 적극적으로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는 걸 안다. 본인 연구하기에도 바쁘고, 괜히 이런 논쟁에 끼어들었다가 수많은 대중을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도 크기 때문이다. 또한, 오류를 검증하는 데에는 얻는 것에 비해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더욱이 저 책팔이들은 수많은 분야들을 넘나들기 때문에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 하더라도 지적할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다. 아마 이런 점을 노리고 책팔이들이 여러 분야를 과감하게 종횡무진하는 것일 테다. 이런 문제들로 인한 학계의 침묵이 아쉽지만, 그나마 진화생물학자 Darshana Naraynan처럼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는 몇몇 학자들이 있어 최소한의 숨통은 트인다. 

사람들은 부실한 자재로 아파트를 쌓아 올리면 위험하다는 걸 알지만, 부실한 사실들을 쌓아 주장을 만드는 것의 위험성에는 둔감하다. 신체 단련에는 열심이면서, 정신수양에는 게으른 현대인들의 태도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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